내손으로 내집짓기 현실은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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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7-24 09:54 조회15,741회 댓글0건본문
내손으로 내집짓기 현실은 ‘악몽’이었다
강원도 인제 귀농 김영수씨의 ‘악전고투 8개월’
전원에서 스스로 살아갈 알토란같은 집을 짓고 가족들과 그 집에 깃들여 평화롭게 산다는 것.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꿈이다. 그 꿈을 위해 사람들은 전원으로 떠나지만, 그들이 만나는 현실은 ‘낭만’이 아닌 ‘악전고투’로 요약된다.
한때 잘 나가는 중견기업 간부였던 김영수(45)씨. 그가 강원도 인제군 진동면 꿩밭골에서 경험한 집짓기는 낭만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 집짓기를 시작하면서 김씨는 도처에서 ‘적’들을 만났고, 수없이 자행되는 ‘반칙’과 싸워야 했다.
도시를 떠나오기 이전부터 농사일과 집짓기를 가르치는 학교도 다니면서 ‘내공’을 쌓았지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임시거처로 마련한 셋집에 팔뚝만한 쥐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건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담합으로 똘똘 뭉친 지방 건축업자들과 독점의 지위를 내세우며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배짱을 부리는 건축자재상. 거기다가 일에는 관심없이 대낮부터 불콰해진 얼굴로 술병만 쓰러뜨리던 인부들이었다. 계획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고 매일매일 설계도가 바뀌었다.
한국에서의 내집짓기 현실은 이렇다. 그러나 내 집을 내가 지어보겠다는 꿈을 포기할 순 없다. 여기, 한국에서의 내집짓기를 하면 숱한 절망과 좌절을 경험한 끝에 내손으로 침목에서 배선과 난방까지 기술을 배워가며 내집짓기를 해낸 ‘불사조 인생’이 있다. 그의 집짓기, 그 멀고도 험한 여정을 들어보자.
8개월동안의 악전고투 집짓기가 끝나고 지난 10월초. 드디어 집이 완성됐다. 새집으로 입주하는 날, 거실 창문으로 비오는 점봉산자락의 오색단풍을 내다보던 아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김영수(45)씨는 그런 아내의 어깨를 감싸쥐고 귀에다 다정하게 속삭였다. “여보, 이 집을 건축업자에게 맡겼으면, 지금 당신의 눈물도 없었을거요.” 고진감래.
그렇지만 아내는 ‘다시는 이런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사실 남편 김씨도 그건 마찬가지다. 살다보면 더 좋은 집을 짓고 싶은 꿈이야 왜 없을까만, 당분간은 집 한채 지으면서 겪었던 수많은 상처로 새롭게 연장을 들 힘이 생기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1. 집짓다가 감행된 아내의 가출.
아내가 짐을 싸들고 두 아이와 함께 친정으로 가버린 날, 김씨는 그야말로 참담했다. 전원에서 제손으로 집을 지어 단란하게 살겠다던 꿈을 가지고 오지 중의 오지라는 강원도 인제군 진동면으로 들어온지 1년여.
허물어져가는 8평짜리 집에서 온식구가 기거하는 옹색한 생활이었지만 ‘내집짓기의 꿈’으로 견딜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집짓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꿈이 얽히기 시작했다. 그토록 주도면밀하게 준비했건만 땅설고 물선 타지땅에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귀농동료들이 집짓다가 이혼했다는 얘기가 퍼뜩 생각이 나더군요. 수시로 터지는 예상치 않았던 문제들과 담합으로 똘똘뭉친 건축업자들의 농간, 끝이 보이지않는 노동에 대한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아내가 떠난 후 김씨는 집짓는 일을 하면서 외지에서 데려온 인부들의 밥을 지어주는 일까지 떠맡게 됐다. 집을 짓는 중노동을 하면서 새참까지 합쳐 하루 6끼씩을 챙겨야 했으니, 김씨가 겪은 고생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꼭 40일만에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왔다. 아내의 친정행은 사실 남편을 향한 것은 아니었고, 일주일이 멀다하고 설계도를 바꿔대는 건축업자와 인부들에 대한 경고성 스트라이크였다. 이대로 끌려가서는 도저히 안될 것 같았다는 게 아내 고현희(41)씨의 설명이다.
#2. 업자들의 담합과 배짱에 맞서다.
김씨는 별장으로 사용할 것도 아니고, 식구들이 실제로 생활해나갈 집이니 소박하게 꾸미고 싶었다. 처음에는 통나무와 황토로 집을 지으려했지만 건축비가 만만치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건축비가 저렴한 샌드위치 패널로 집을 짓기로 했다. 일주일여를 기초공사에 매달려 시멘트를 부을 거푸집을 만들었다. 그런데 레미콘이 문제였다.
“레미콘 시멘트 1입방미터(1㎥)당 8만원을 부르더라고요. 그때 서울이나 다른 대도시에서는 1입방미터당 5만5000원이었어요. 비싸면 쓰지 말라더군요. 계산해보니 집기초를 다지는데만 레미콘 시멘트가 750만원어치가 들어가더라고요.”
김씨는 결국 레미콘을 부르는 일을 포기했다. 복배근을 엮어놓은 기초를 모두 해체했다. 경운기를 한대 사서 여기에 시멘트와 모래를 실어날랐고 직접 시멘트를 섞어 흙손으로 기초를 발랐다. 아내는 물론이고 초등학교 5학년인 자원(12)이와 3학년 정환(10)이까지도 돌을 주워 날랐다.
전력공사도 마찬가지였다. 전기계량기를 2개로 나누는 배분공사를 의뢰하자, 업자들은 50만원을 요구했다. 한전불입금 15만원을 제하고 반나절도 안되는 일에 일당이 35만원이라는 것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다른 업자들과 접촉해봤지만 모조리 ‘50만원’을 불렀다. 한 업자는 “이 근방에서는 모두 50만원을 받기로 약속했으니, 다른 곳엘 가봐도 소용없다”고 했다. 결국 김씨는 배분공사를 포기했다. 불합리한 업자들의 담합에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아직까지도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
#3. 예기치 않았던 복병을 만나다
업자들의 담합이나 배짱만 문제가 됐던 것은 아니다. 집을 지으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잇따라 터졌다. 전화가설을 신청하자 전화 전신주를 세우는 비용이 청구됐다. 기존 전화선에서 200m이상 떨어진 경우 수익자부담의 원칙에 따라 수용자가 전신주를 세우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물어야 했다. 전신주 하나에 22만원씩 모두 66만원이 들었다.
전기의 경우는 더 아찔했다. 전기도 전화와 마찬가지로 선을 끌어오려면 전신주 비용을 내야 했는데, 비용이 전신주 1개당 300만원 안팎이었다.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수천만원의 비용이 나갈 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씨의 집은 기존의 전기선을 끌어올 수 있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치밀하게 준비를 해왔다던 김씨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측량과정에서도 시행착오를 겪었다. 경계측량에 70만원, 대지분할에 45만원, 건물현황에 12만원이 들었다. 거기다가 건축과정에서 아무 생각없이 땅이 나뉘어 나가지 않아도될 필지분할 측량비 26만원이 추가로 들었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추가지출이 하나씩 늘어나면서 나중에는 관공서로부터 연락이 오면 덜컥 겁부터 났다.
#4.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집짓기 준비
김씨는 그나마 철저하게 준비해서 남들보다 어려움을 덜 겪은 편이었다. 김씨는 전원생활을 꿈꾸기 시작한 때부터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에 집터를 마련하기까지 5년여가 걸렸다. 먼저 2~3년은 남의 집을 짓는 곳에 찾아가 무보수로 품앗이를 하기도 했고, 아내와 귀농학교에 등록해 농사일을 배우기도 했다.
그런 다음 1년간은 정착지를 찾아 나섰다.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휴가를 내고 전국을 돌아다녔다.그래서 택한 곳이 바로 강원도 인제의 점봉산 자락. 먼저 셋집을 얻어서 농사를 지으며 1년동안 살면서 집터를 물색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현지주민들의 일상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겠다 싶었다. 또 농지취득자격증명을 받게 돼 땅구입비용을 600만원이상 절약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그러나 1년이상 비어있던 농가 전셋집 생활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2평짜리 방4개가 밭전(田)자로 놓여있던 8평짜리 집. 중형아파트의 안락한 생활에 익숙해진 아내와 아이들은 장작불을 때는 허름한 집에서의 생활을 잘도 참아줬다.
그런데 방안에 팔뚝만한 쥐들이 출몰한 뒤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그 눈물은 전원으로 떠나온 것에 대한 후회라기보다는 ‘새로운 집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
#5. 김씨 가족의 집짓기 손익계산서
김씨 가족은 드디어 지난 10월 새 집으로 입주했다. 따스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안에서는 김씨 부부와 초등학생 두 아이들이 찐감자를 앞에 놓고 거실에 둥글게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오디오에서는 낭만적인 클래식 기타의 선율이 흐르고 창밖에는 사르륵 사르륵 눈이 쌓여 점봉산 산자락을 덮어가고 있다. 김씨와 아내 고씨는 “도회지에서의 번잡스러운 생활과 집짓기의 고생이 마치 먼 꿈만 같다”고 했다.
김씨의 50평짜리 보금자리는 텃밭을 포함한 땅값과 건축비를 합쳐 모두 1억5000만원 정도가 들었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직접 팔을 걷어붙이며 절약에 절약을 거듭해서 지출한 금액이다.
김씨는 “스스로 살 집을 짓는 것이라 기초 철근도 2배로 들였고, 마감도 좋은 자재를 골라 꼼꼼하게 했다”며 “집장사의 집이라면 돈이 덜 들 수도 있었겠지만 외양만 번듯했을 것”이라고 했다.
김씨부부가 집짓기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가족간의 소중한 사랑과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이제 집을 완성한 김씨 가족은 누구보다도 안온한 겨울을 나면서 내년 농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들이 꿈꿔온 전원에서의 평화로운 삶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는 것이다.
박경일기자
강원도 인제 귀농 김영수씨의 ‘악전고투 8개월’
전원에서 스스로 살아갈 알토란같은 집을 짓고 가족들과 그 집에 깃들여 평화롭게 산다는 것.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꿈이다. 그 꿈을 위해 사람들은 전원으로 떠나지만, 그들이 만나는 현실은 ‘낭만’이 아닌 ‘악전고투’로 요약된다.
한때 잘 나가는 중견기업 간부였던 김영수(45)씨. 그가 강원도 인제군 진동면 꿩밭골에서 경험한 집짓기는 낭만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 집짓기를 시작하면서 김씨는 도처에서 ‘적’들을 만났고, 수없이 자행되는 ‘반칙’과 싸워야 했다.
도시를 떠나오기 이전부터 농사일과 집짓기를 가르치는 학교도 다니면서 ‘내공’을 쌓았지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임시거처로 마련한 셋집에 팔뚝만한 쥐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건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담합으로 똘똘 뭉친 지방 건축업자들과 독점의 지위를 내세우며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배짱을 부리는 건축자재상. 거기다가 일에는 관심없이 대낮부터 불콰해진 얼굴로 술병만 쓰러뜨리던 인부들이었다. 계획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고 매일매일 설계도가 바뀌었다.
한국에서의 내집짓기 현실은 이렇다. 그러나 내 집을 내가 지어보겠다는 꿈을 포기할 순 없다. 여기, 한국에서의 내집짓기를 하면 숱한 절망과 좌절을 경험한 끝에 내손으로 침목에서 배선과 난방까지 기술을 배워가며 내집짓기를 해낸 ‘불사조 인생’이 있다. 그의 집짓기, 그 멀고도 험한 여정을 들어보자.
8개월동안의 악전고투 집짓기가 끝나고 지난 10월초. 드디어 집이 완성됐다. 새집으로 입주하는 날, 거실 창문으로 비오는 점봉산자락의 오색단풍을 내다보던 아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김영수(45)씨는 그런 아내의 어깨를 감싸쥐고 귀에다 다정하게 속삭였다. “여보, 이 집을 건축업자에게 맡겼으면, 지금 당신의 눈물도 없었을거요.” 고진감래.
그렇지만 아내는 ‘다시는 이런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사실 남편 김씨도 그건 마찬가지다. 살다보면 더 좋은 집을 짓고 싶은 꿈이야 왜 없을까만, 당분간은 집 한채 지으면서 겪었던 수많은 상처로 새롭게 연장을 들 힘이 생기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1. 집짓다가 감행된 아내의 가출.
아내가 짐을 싸들고 두 아이와 함께 친정으로 가버린 날, 김씨는 그야말로 참담했다. 전원에서 제손으로 집을 지어 단란하게 살겠다던 꿈을 가지고 오지 중의 오지라는 강원도 인제군 진동면으로 들어온지 1년여.
허물어져가는 8평짜리 집에서 온식구가 기거하는 옹색한 생활이었지만 ‘내집짓기의 꿈’으로 견딜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집짓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꿈이 얽히기 시작했다. 그토록 주도면밀하게 준비했건만 땅설고 물선 타지땅에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귀농동료들이 집짓다가 이혼했다는 얘기가 퍼뜩 생각이 나더군요. 수시로 터지는 예상치 않았던 문제들과 담합으로 똘똘뭉친 건축업자들의 농간, 끝이 보이지않는 노동에 대한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아내가 떠난 후 김씨는 집짓는 일을 하면서 외지에서 데려온 인부들의 밥을 지어주는 일까지 떠맡게 됐다. 집을 짓는 중노동을 하면서 새참까지 합쳐 하루 6끼씩을 챙겨야 했으니, 김씨가 겪은 고생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꼭 40일만에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왔다. 아내의 친정행은 사실 남편을 향한 것은 아니었고, 일주일이 멀다하고 설계도를 바꿔대는 건축업자와 인부들에 대한 경고성 스트라이크였다. 이대로 끌려가서는 도저히 안될 것 같았다는 게 아내 고현희(41)씨의 설명이다.
#2. 업자들의 담합과 배짱에 맞서다.
김씨는 별장으로 사용할 것도 아니고, 식구들이 실제로 생활해나갈 집이니 소박하게 꾸미고 싶었다. 처음에는 통나무와 황토로 집을 지으려했지만 건축비가 만만치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건축비가 저렴한 샌드위치 패널로 집을 짓기로 했다. 일주일여를 기초공사에 매달려 시멘트를 부을 거푸집을 만들었다. 그런데 레미콘이 문제였다.
“레미콘 시멘트 1입방미터(1㎥)당 8만원을 부르더라고요. 그때 서울이나 다른 대도시에서는 1입방미터당 5만5000원이었어요. 비싸면 쓰지 말라더군요. 계산해보니 집기초를 다지는데만 레미콘 시멘트가 750만원어치가 들어가더라고요.”
김씨는 결국 레미콘을 부르는 일을 포기했다. 복배근을 엮어놓은 기초를 모두 해체했다. 경운기를 한대 사서 여기에 시멘트와 모래를 실어날랐고 직접 시멘트를 섞어 흙손으로 기초를 발랐다. 아내는 물론이고 초등학교 5학년인 자원(12)이와 3학년 정환(10)이까지도 돌을 주워 날랐다.
전력공사도 마찬가지였다. 전기계량기를 2개로 나누는 배분공사를 의뢰하자, 업자들은 50만원을 요구했다. 한전불입금 15만원을 제하고 반나절도 안되는 일에 일당이 35만원이라는 것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다른 업자들과 접촉해봤지만 모조리 ‘50만원’을 불렀다. 한 업자는 “이 근방에서는 모두 50만원을 받기로 약속했으니, 다른 곳엘 가봐도 소용없다”고 했다. 결국 김씨는 배분공사를 포기했다. 불합리한 업자들의 담합에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아직까지도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
#3. 예기치 않았던 복병을 만나다
업자들의 담합이나 배짱만 문제가 됐던 것은 아니다. 집을 지으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잇따라 터졌다. 전화가설을 신청하자 전화 전신주를 세우는 비용이 청구됐다. 기존 전화선에서 200m이상 떨어진 경우 수익자부담의 원칙에 따라 수용자가 전신주를 세우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물어야 했다. 전신주 하나에 22만원씩 모두 66만원이 들었다.
전기의 경우는 더 아찔했다. 전기도 전화와 마찬가지로 선을 끌어오려면 전신주 비용을 내야 했는데, 비용이 전신주 1개당 300만원 안팎이었다.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수천만원의 비용이 나갈 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씨의 집은 기존의 전기선을 끌어올 수 있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치밀하게 준비를 해왔다던 김씨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측량과정에서도 시행착오를 겪었다. 경계측량에 70만원, 대지분할에 45만원, 건물현황에 12만원이 들었다. 거기다가 건축과정에서 아무 생각없이 땅이 나뉘어 나가지 않아도될 필지분할 측량비 26만원이 추가로 들었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추가지출이 하나씩 늘어나면서 나중에는 관공서로부터 연락이 오면 덜컥 겁부터 났다.
#4.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집짓기 준비
김씨는 그나마 철저하게 준비해서 남들보다 어려움을 덜 겪은 편이었다. 김씨는 전원생활을 꿈꾸기 시작한 때부터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에 집터를 마련하기까지 5년여가 걸렸다. 먼저 2~3년은 남의 집을 짓는 곳에 찾아가 무보수로 품앗이를 하기도 했고, 아내와 귀농학교에 등록해 농사일을 배우기도 했다.
그런 다음 1년간은 정착지를 찾아 나섰다.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휴가를 내고 전국을 돌아다녔다.그래서 택한 곳이 바로 강원도 인제의 점봉산 자락. 먼저 셋집을 얻어서 농사를 지으며 1년동안 살면서 집터를 물색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현지주민들의 일상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겠다 싶었다. 또 농지취득자격증명을 받게 돼 땅구입비용을 600만원이상 절약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그러나 1년이상 비어있던 농가 전셋집 생활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2평짜리 방4개가 밭전(田)자로 놓여있던 8평짜리 집. 중형아파트의 안락한 생활에 익숙해진 아내와 아이들은 장작불을 때는 허름한 집에서의 생활을 잘도 참아줬다.
그런데 방안에 팔뚝만한 쥐들이 출몰한 뒤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그 눈물은 전원으로 떠나온 것에 대한 후회라기보다는 ‘새로운 집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
#5. 김씨 가족의 집짓기 손익계산서
김씨 가족은 드디어 지난 10월 새 집으로 입주했다. 따스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안에서는 김씨 부부와 초등학생 두 아이들이 찐감자를 앞에 놓고 거실에 둥글게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오디오에서는 낭만적인 클래식 기타의 선율이 흐르고 창밖에는 사르륵 사르륵 눈이 쌓여 점봉산 산자락을 덮어가고 있다. 김씨와 아내 고씨는 “도회지에서의 번잡스러운 생활과 집짓기의 고생이 마치 먼 꿈만 같다”고 했다.
김씨의 50평짜리 보금자리는 텃밭을 포함한 땅값과 건축비를 합쳐 모두 1억5000만원 정도가 들었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직접 팔을 걷어붙이며 절약에 절약을 거듭해서 지출한 금액이다.
김씨는 “스스로 살 집을 짓는 것이라 기초 철근도 2배로 들였고, 마감도 좋은 자재를 골라 꼼꼼하게 했다”며 “집장사의 집이라면 돈이 덜 들 수도 있었겠지만 외양만 번듯했을 것”이라고 했다.
김씨부부가 집짓기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가족간의 소중한 사랑과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이제 집을 완성한 김씨 가족은 누구보다도 안온한 겨울을 나면서 내년 농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들이 꿈꿔온 전원에서의 평화로운 삶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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